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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곡동

지명유래

매곡은 토박이 말로 저우실이라고 한다. 겨슬실→겨△실→겨우실→저우실의 변화로 풀이된다. 매화는 설중매란 말처럼 겨울의 추운 기후에도 피고, 오행으로 북은 겨울을 뜻한다. 매년 매곡동 관내 김관수씨의 집 뜨락 남향 언덕배기에는 전국에서 가장 먼저 매화가 피어 화제가 되기도 한다. 매곡동의 면적은 순천시 전체면적의 0.15%인 1.42㎢이며 향동,삼산,조곡,중앙동과 접하고 있다. 2009년 3월 31일 현재 2,504세대 6,330명이 살며 남자는 3,131명 여자는 3,199명이다.

매곡동은 주택과 아파트가 조화된 주거지역으로 순천대학교를 비롯 초,중,고 등 7개의 학교가 밀집되어 있는 교육의 요충지이며, 또한 광주전남지방통계청순천출장소,북부시장, 고속터미널등이 소재해 있고 종교시설, 병의원 등이 많이 있어 행정, 종교, 상업, 교통의 중심지로써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지역이다.

지정문화재는 없으나 유적으로는 1909년 효자 김중석의 효열을 기리고자 호남사람이 조정에 건의 명정을 받아 세워진 광산김씨 김중석효자문(매곡동 136번지 소재)이 있고, 읍성 북쪽 약 2km 지점인 매곡동 뒷산을 중심으로 약 700m에 걸친 난봉산성이 있다. 매곡산성이라고도 하며 당시 이 지역의 요새지로 인정되는데 지금도 산에 오르면 산성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이 산성은 도성 북문 밖의 외곽방어를 맡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임진왜란 때의 전적지라고 전해오고 있다. 난봉산이란 이름은 박난봉 장군의 묘가 이 산의 동남쪽의 기슭에 있어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난봉산성(鸞鳳山城)

난봉산성은 읍성에서 북쪽으로 약 2km지점인 매곡동 뒷산을 중심으로 약 700m에 걸친 산성이며, 매곡산성이라고도 한다. 이 산성은 당시 이 지역의 요새지로 인정되는데, 지금도 산에 오르면 산성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이 산성은 도성 북문 밖의 외곽방어를 맡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임진왜란 때의 전적지라고 전해오고 있다. 난봉산성에 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옛 성터가 있다."고만 되어 있을 뿐 성의 규모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다만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성의 명칭이 매곡산성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성의 규모나 형식에 대해서 "높이 2~4간(間), 둘레 약 400간의 방형누지로서 난봉산의 남향으로 돌출한 일지맥(一支脈)의 산정에 위치하고 있는데,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임진왜란때 방어를 위해 쌓았다고 하나, 축성구조로 볼 때 삼국시대의 성으로 인정된다."고 조사되어 있다. 난봉산이란 이름은 박난봉 장군의 묘가 이 산의 동남쪽 기슭에 있어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박난봉은 순천 박씨 중시조인 박영규의 4대손으로 고려 정종때의 인물이며, 직위가 대장군에 이르러 사후에 평양(平陽 : 순천의 옛 이름)부원군으로 책봉되었다.

박난봉(朴蘭鳳)전설

박난봉 이야기는 박영규전설과 연결되어 전하며, 역시 역사적 인물의 신격화라는 신화적 구조를 취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난봉은 특출한 영웅의 자태로서 이곳의 군장이 되어서 인제산에서 마을 뒤편 진산에 이르기까지 성을 축조하고 그곳에 웅거하였다. 죽어서는 인제산의 산신이 되었다(『강남악부』. 14쪽)

박난봉전설은 앞에서 본 김총전설, 박영규전설과 마찬가지로 신화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전설들은 신격의 유래를 설명하고, 또한 제의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으로 보아 신화로도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이어 『강남악부』에는 인제산성에 대한 이야기와 박난봉이 아전 이환생의 꿈에 나타나 신당을 짓게 되는 이야기들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신당을 짓게 되기까지의 내력이 길게 기술되어 있다. 인제산성 안에는 정령이 있어 구름끼고 비오는 날에는 병사와 말의 행진 소리가 마을 골짜기를 진동하여 마을사람들이 무서워했다고 하며, 이환생을 통해 짓게 한 신당에 무당이나 승려가 머물지 못하고 떠나는 이유도 정령의 진동에 겁이 나서였다고 한다. 박난봉이 신비스러운 존재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박난봉에 대한 구전은 지금도 몇 가지가 전한다. "인제산에 용마발터가 있는데, 박장군이 탔던 말의 발자국이다."라든가, "박장군이 죽도봉에서 인제산까지 말을 타고 휘휘 날아다녔다." 등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그리고 다음에서는 박난봉을 보다 전설적 면모를 지닌 장수로 형상화하고 있다. 난리 때 장군이 지나갔는디, 장군이 탄 말이 상사면 저쪽으로 넘어 오는디, 이 마을에 들어와 갖고 그 말발떼죽이 여기 큰골 가면 하나 있었고, 이 회관 지은 지가 오륙 년 되었는디, 회관 짓기 전에 바로 화장실 곁에가 하나 있고, 그리고 거기 지내서 죽도봉 가면 하나가 시방도 있어요. 그런디 말이 죽도봉 건너가는디, 어린애들이 장난침스러 말을 건드러부러서 말이 인자 떨어져 죽었다. 그래갖고 장군님은 저리 박난봉이라고 금곡동 가면 있습니다. 거리 글로 들어가고, 그런디 감스로 벚꽃나무를 한 가지 끊어갖고 짝 꼽아놈서"요 나무가 살면 내가 산 줄 알고 죽으면 죽은지 알아라." 그랬는디, 살아갔거 시방도 살아 있다는 그런 유래가 있는디, 또 그래 가지고 계란을 놔둠시로"요 계란이 며칠 지낸 뒤 닭이 돼가지고 울 것이다. 울었으면 내가 살고 닭이 안 되면 내가 죽을 것이다." 그랬다는디, 지금도 말발떼죽 같은 것을 발견할 수 가 있어.(임성래. 「순천시의 구비문학」, 『순천시의 문화유적』 1992, 298~299쪽)

위의 '나무재생' 삽화는 다른 영웅담에서도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박난봉전설이 영웅담의 한 유형으로 전승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주인공의 생존을 현존하는 나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나옹전설, 최치원전설, 이순신전설 등에도 나오며 도선전설의 적삼바위 삽화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이들 전설에서와 같이 박난봉이 전설적 지지를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광산김씨 김중석효자문(金重錫孝子門) - 매곡동 136번지 소재

1909년 효자 김중석의 효열을 기리고자 호남사림이 조정에 추천하여 세워진 효자문이다. 김중석은 화평부원군 심(?)의 20세손으로 광산 김씨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가사에 종사하여 부모의 교훈을 받들어 그 명성이 높았다. 부친이 병으로 자리에 눕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수혈하는등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0여 년 후에 호남사림이 조정에 건의 함으로써 명정을 받아 효자문을 건립하였다. 후인들은 이 효자문을 지날 때마다 '진효자비각(眞孝子碑閣)'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의 두 아들도 모두 효성이 지극하여 인근 마을로부터 '일문삼효(一門三孝)'의 집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현재 이 효자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식 기와지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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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최종 수정일 : /
2018-12-19